내가 겪은 독특한 알바 경험

콜센터 알바 썰 – 감정보다 대본이 먼저였던 하루들

sunny06301 2025. 9. 25. 22:58

목소리만으로 일한다는 것의 무게

대학 2학년 여름방학,
지인의 소개로 콜센터 상담 알바를 시작하게 됐다.
날씨도 덥고 외근은 피하고 싶었고,
실내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앉아서 전화만 받는 거니까 편할 거야"라는 말도
그 선택에 영향을 줬다.

처음 출근한 날,
나는 텅 빈 사무실에 줄지어 앉아 있는
헤드셋 쓴 사람들을 보고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각자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표정은 무표정했다.
그때는 몰랐다.
감정보다는 대본이 먼저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걸.

 

상담은 내 말이 아닌 정해진 문장으로

콜센터의 상담은 생각보다 훨씬 기계적이었다.
모든 상황에 맞춰 정해진 응답 문장이 있었고,
고객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담원은 그 틀 안에서만 말해야 했다.
예를 들어, 고객이 화를 내도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확인 후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정해진 문장만을 반복해야 했다.

초반에는 왜 이렇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내 입장에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고,
조금만 더 편한 말투로 다가가면
상황이 더 부드러워질 것 같았지만,
매뉴얼은 단호했다.
“개인 의견은 절대 말하지 말 것.”
“공감 문구는 정해진 것 외에는 금지.”

고객과의 대화가 아니라,
스크립트를 읊는 기분이었다.
목소리는 내 것이지만,
내용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낯설고 비인간적인 방식은
상담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에 묘한 피로감을 남겼다.

쌓여가는 감정, 터질 곳 없는 스트레스

콜센터 알바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말 자체보다 그 말 뒤에 쌓이는 감정의 무게였다.
하루에 수십 명의 고객과 대화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문제 해결보다
불만을 쏟아내는 데 집중했다.
실제로 어떤 고객은
처음부터 고함을 지르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 사람은 제품 문제보다
그날 자신의 기분이 더 안 좋았던 것 같았다.

감정을 삭이며 “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지만
정작 마음속엔 점점 억울함과 짜증이 쌓였다.
가끔은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사과해야 하나,
왜 나의 인격을 감추고
기계처럼 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정말 억지 주장을 하는 고객을 만나면
아무리 정중하게 설명해도
“그게 네가 할 말이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너 지금 화난 거 아니야?”라고
무리하게 감정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럴 땐 오히려
내 감정보다 목소리 톤이 먼저 점검됐다.
지쳤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내 목소리조차 연기해야 했다.

고객 응대가 끝난 후엔
책상을 주먹으로 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 일은 사무실 전체가 조용한 가운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쌓아두는 게 일상이었다.
그 억눌림은 퇴근 후까지 따라왔다.
집에 가서도 한참 동안 말이 없어질 정도로
감정 소모가 컸다.
콜센터 상담은 그냥 “전화 받는 일”이 아니었다.
무례와 오해, 억울함을 무표정하게 받아들이는 감정 노동이었다.

그래도 남는 건 결국 태도였다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방법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정해진 문장을 그대로 쓰되,
말의 속도와 톤을 조절해서
조금 더 ‘사람처럼’ 들릴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예를 들어 같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단조롭게 말하지 않고,
미세하게 감정을 담아 전달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감정을 끌고 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날 들었던 욕설이나 무례한 말들을
하나씩 마음에서 털어내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잘 안 됐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니
점점 더 ‘내 마음은 내 공간에서 회복한다’는 태도가 생겼다.

흥미롭게도,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의 감정을 대할 때
훨씬 더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내가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웠다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체득했다고 느꼈다.
그건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유용한 기술이었다.

전화기 너머, 나를 지키는 기술을 배운 시간

콜센터 알바는
단순히 전화 받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감정을 조절하며 타인의 분노를 받아내는 일이었고,
말 한마디에도 긴장해야 하는
정신적 근력 훈련에 가까웠다.

감정보다는 대본이 먼저였지만,
그 대본 속에서도
내 진심을 조금씩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과정이
결국 내 언어 습관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지금은 누군가 전화를 받을 때
그 목소리의 얇은 떨림조차 읽을 수 있게 됐다.
감정 뒤에 숨은 피로를 공감하게 되었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하루의 전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일은
내가 내 감정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법을 배우게 해줬다.
불합리한 요구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기준으로 버티고 조율하는 법.
그건 어떤 직장을 가더라도,
심지어 인간관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콜센터는 감정 없는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가장 많이 쌓이고 소모되는 일터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법,
내 마음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말에 무너지지 않는 중심을
나는 그 좁은 책상 위에서 조금씩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