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관리 아르바이트 후기 – 고요한 공간에서 배운 느림의 의미
사람은 없지만 시간이 흐르던 곳
“거기 사람도 없고 일도 많지 않아. 그냥 하루 종일 조용히 있으면 돼.”
이 말 한마디에 나는 폐교 관리 아르바이트를 수락했다.
시골 마을 외곽에 위치한 작은 초등학교였고,
몇 년 전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내 역할은 단순했다.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감시하고,
학교 건물의 전기, 수도 상태를 점검하고, 비 오는 날은 창문을 닫는 것.
사실상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건물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출근 첫날, 교문을 열고 들어서자
낡은 운동장, 바랜 벽, 꺼진 전등 아래서 느껴지는 이상한 정적이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비일상적인 체험으로 만들어주었다.
사람이 떠난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곳에 남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멈춘 듯한 교실 속 작은 움직임들
폐교 건물 안은 생각보다 정돈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멈춘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칠판엔 누군가 지우지 않은 날짜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책상에는 낙서가 옅게 남아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이는 나무 마루 소리와
어디선가 날아든 먼지가 빛에 떠다녔다.
나는 오전마다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환기했다.
교무실과 보건실, 체육 창고까지 조용히 순찰하는 기분이었다.
별일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한 번은 2층 교실의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걸 발견하고
직접 형광등을 교체해야 했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 뭔가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긴장되었고,
작은 소리 하나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주변이 고요했다.
가끔은 마을 어르신이 산책 삼아 들르기도 했고,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다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이 조용한 공간이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독 속에서 흐른 생각들
사람이 없는 공간에 혼자 오래 머물면 생각이 많아진다.
특히 시계 소리만 들리는 교실 안에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내 삶을 되짚게 된다.
대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지금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이곳에선 누가 말 걸어주지도 않고,
스마트폰조차 잘 터지지 않아 자연스럽게 사유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풀벌레 소리, 나무 사이로 바람 부는 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트럭 소리 같은 것들이
묘하게 명상처럼 들리곤 했다.
나는 점점 이 고요함이 싫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이 공간 덕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었다.
늘 자극적이고 바쁘게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조용한 하루는 오히려 내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선물 같았다.
또한, 이 고요함은 내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주었다.
평소에는 바쁘게 지나쳐버린 감정들,
예를 들면 작은 불안이나 말 못 한 서운함 같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감정들과 잠시 마주 앉아,
억지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됐다.
그건 생각보다 어렵고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은 없었지만 배운 건 많았다
이 아르바이트는 일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 경험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의 가치를 배우게 해준 시간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 멈춰 있는 공간, 말이 없는 하루들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마냥 심심하거나 지루하다고 느낄 줄 알았지만,
막상 그 안에 있으니 나는
‘나 자신과 조용히 함께 있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퇴근 시간 즈음, 하늘이 붉게 물들면
나는 운동장 한쪽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 풍경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깊은 위로가 되었던 날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흐르고 있고,
그 안에서 나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었다는 것을.
일이란 단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공간을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걸.
멈춰 있는 공간에서 얻은 가장 느린 깨달음
폐교 관리 아르바이트는
누군가에겐 한가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느림’의 가치와
‘혼자 있는 법’을 배웠다.
사람이 없어도 공간이 주는 메시지는 강했고,
나는 그 속에서 묵직한 사색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고요했던 며칠은 내 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지금도 가끔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 속에서 그때의 운동장을 떠올리곤 한다.
그곳의 공기, 그곳의 햇살, 그곳의 정적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건
효율보다 느림, 성과보다 관찰,
말보다 침묵일지도 모르겠다.
폐교라는 공간은 말이 없었지만,
그곳은 나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건넸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앞으로 내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멈춰 보는 태도’를 잃지 않게 해줄 것 같다.
사람이 없는 공간이 나에게 말해준 건,
결국 나 자신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내면을 돌아보는 법을 배웠고,
그 느린 깨달음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고 있다.